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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에 쓴 글. 
생각나서 옮겨 보았다..

1
어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이렇게들 말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동시에 거대 담론 논의의 유통기한은 끝났다고 말이다. 그래서 여전히 민족통일이니 노동해방이니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말이다. 
일단 그건 사실이다. 우선 그러한 논의의 주체로 볼 수 있는 ‘민족 구성원’이나 ‘노동자’는 현상(現狀)에서는 실존하지 않는 에테르임이 확정되었다. 또 그런 사람들이 지적하는 그 거대 담론이라는 실체에 합당할 논의들은 이제는 그러한 것들의 존재 자체가 시대착오적이기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맥락에서 논의되는 것들이 존재하게 되며, 모순적인 상황은 언제나 그대로이지 않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현재 일정한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논의들은 민족이나 국가이성과 같은 무지막지하지만 일정한 정의나 개념들의 집합으로 확인될 수 있던 존재들 이상으로, 개인의 뇌하수체나 신체, 혹은 욕망 등에 신경을 쓰고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베를린 장벽의 철거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동구권의 이탈 징후, 미합중국의 대 소비에트 정책의 변화 등의 외부적인 문제들과 블라드미르 일리치가 NEP정책을 계획하면서부터 시작된, USSR이라는 명칭의 국가에서의 유사국가자본주의화와, 비정상적인 당(黨)의 존재 등의 내부적인 문제가 상응되어 나타난 결과이며,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스스로 파국을 부른 것은 아니다. 또한 베를린 장벽의 철거의 경우에는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의 종언과 한 쪽 진영의 일방적 승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쪽이 아직 많은 점에서 그 모체였던 낡은 사회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구체적 타당성 수준을 벗어나서는 그와 같은 일방적인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들은, 팩트(fact)이기보다는 임팩트(impact)에 가까울 뿐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인과관계에 의한 결과의 성격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을 정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근대 국가 체제가 가지고 있는 모순점은 그 이후에 오히려 심화되었다. 지속적으로 남북문제가 심화되었으며, 현대 자본주의의 상징인 미합중국은 1960년대 이후, 오랜만에 민족주의와 가시적으로 결합함을 계속적이며 확실하게 선보였다. 또한 이러한 상태에서 개인은 역시 이미지네이션(imagnation)으로서의 개인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다. 요컨대 사실상, 종전과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2
어쨌든 그러한 속빈 강정 격의 논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하고 있으며, 19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전 국가적으로 퍼진 속칭 ‘레드 컴플렉스’가 머리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학우들이 많아지면서, 대학의 진보운동 진영은 큰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그 이후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진 유사 개인주의, 다시 말해 기저에는 유사 파시즘이 깔려 있으며 겉으로 보기엔 개인주의인 그것 덕택에 그것들에 대한 학우들의 관심은 더욱 더 시들해져만 갔다. 
진보운동 진영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학회·학술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학원 민주화 조치 이후, 미시정치영역에서 학우들을 조직하여 학습의 장으로 이끌려 했던 학회 운동과 사회의 모순에 관한 제(諸) 논의들을 학내에 유입시키는 역할을 맡았던 학술 운동 모두 학우들의 전반적인 무관심에 의하여 어쩌면 학생회 중심 투쟁체들보다 힘든 상황에 빠졌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계속 되어, 2003년까지 왔다.
현재, 90년대 학생운동의 상징과 다름없었던 몇 개의 단체들이 스스로 합법화를 이야기하며, 당초 의도했던 조직체를 이루기보다는, 기존 단체들이 범했던 조직화의 오류를 답습한 것에 대한 반성적 논의로, 해체를 이야기하기도 하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의사를 좀 더 명확히 표현하기 위하여, 또 그러한 논의를 보다 진전시키고 확실성을 갖게 하기 위하여 결합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다소 혼란스러운 현실 상황을 두고 성급한 사람들은 앞의 베를린 장벽 사례와 마찬가지로 학생운동의 종언이 왔다고 즐거워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것은 시대가 학생회 중심 학생운동이 현 상태에서는 정합성을 상실했다는 판단을 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사회적인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그들의 열망은 아직도 존재하기에, 혹독한 비판을 통한 내적 모순의 발견과, 그것의 완화를 위해 새로운 혹은 변화된 투쟁체의 건설은 뒤따를 것이다.
그렇지만 학회·학술 운동 쪽에서는 일부 단체를 제외하고는 변화의 움직임마저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운동의 특성 상, 미시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며, 특별하게 상근(常勤)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변화 자체를 시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이제는 식상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대학에의 신자유주의 논리의 침투이다. 그로 인해 대학은 학우들을 신자유주의에 맞는 인적 자원(人的 資源)으로 만들기 위하는 일 이외에는 기능을 스스로 탈각(脫却)해 버린다. 여기에 그 전부터 계속되어 왔던 학우들의 전반적인 무관심 등이 결합되어 손을 쓸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3
이러한 상태에 대하여, 아직까지 꾸준한 분석과 대안이 제시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태는 계속해서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내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대안도 결국 마찬가지 신세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호수에 한 사람이 돌을 던지는 것은 표면에 파장을 일으킬 뿐이지만, 수백·수천 사람이 돌을 던지면 쌓이고 쌓이면 호수를 메워버릴 것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학회·학술 운동은 개념상으로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지만, 그 실현에 있어서는 불가분의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학회 운동의 필수 구성 요소인 학습이라는 것이 결국 학술 운동을 지칭할 수 있을 것이며, 또 학술 운동을 통하여 학내로 유입할 논의의 주체들은 학회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무리지만, ‘따로 또 같이’를 제안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의 전제로, 학회·학술 운동의 주체의 명확화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선, 학회·학술 운동은 주체를 ‘일반 학우 대중’으로 이젠 설정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사실 대학 내의 적극적인 신자유주의 침투와 유사 개인주의를 담지하고 있는 학우들의 증가는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것이지만, 학회·학술 운동이 당분간 지향해야 할 우선적인 목표는 최소한의 조직화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제 주체를 ‘학회·학술 운동에 의지가 있는 학우’로 한정하여 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따로’라는 부분은 학회 운동이 맡아야 할 부분과 학술 운동이 맡아야 하는 부분의 대별(大別)을 의도로 한다. 다시 말해, 각자가 해야 할 일을 가능한 한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학회 운동은, 종전에 취하고 있던 입장에서 약간 후퇴하여, 인적 네트워크 형성과 ‘일반 영역’에 대한 학습에 치중해야 할 것이다. 학술 운동의 경우는, 인적 네트워크 형성과 ‘일반 영역’에 대한 학습과 그 영역에서의 논의 유입이라는 몫을 학회 운동에게 넘겨 두고, 대신에 개개인이 관심 있어 하는 특정 논의를 다루는 데에 치중해야 할 것이다.
‘같이’ 부분에서는 학회 운동과 학술 운동의 일정한 양상에서의 결합을 이야기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가지고 학회 세미나를 한 경우, 「민주화 이후의 시장」이라는 소재에 관심 있어 하는 학회원에게 학회 교사는 데이빗 코우츠 씨의 『현대 자본주의의 유형: 세계 경제의 성장과 정체』라는 책을 읽어 보자고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형사사법의 부당한 개인에의 침입에 유별난 관심을 보이는 학회원과 공적영역에서의 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에 관심을 보이는 학회원을 모아 학회 교사가 주축이 되어 조국 교수가 지은『형사법의 성편향』을 가지고 읽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제인 프리드먼 씨의 『페미니즘』을 읽고, 현실 상황에서, 그리고 조금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공간에서의 평등·차이 논쟁을 보고 싶어 하는 학회원이 존재할 경우, 학회 교사는 우에노 치즈코 씨의 『내셔널리즘과 젠더』라는 책의 일부분을 복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학회 운동의 성과를 학술 운동에 반영하고, 또 그 역도 가능하게 하여, 양 자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같이’ 부분의 논의에 있어서는 만족되어야 하는 전제가, 학회 교사의 높은 역량이다. 그러나 모든 학회원들의 각각의 관심분야를 만족시켜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가능한 많은 분야를 다루어 보고 싶고, 또 다루어 보았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따로 또 같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한 것은 사실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 학회·학술 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의 목적이다. 그것은 왜 하는가? 학우들을 미시영역에서 조직화하여 대중 동원에 있어서의 확실한 가능수효 확보 차원과, 운동에 요구되는 학습과, 운동을 위한 이론 보급을 위해서인가? 여태까지 이 물음에 대하여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것이나, 현 상태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사실 그렇지 않아야 옳다. 운동의 목적은 언제든 변화에 맞추어 일관성을 유지하며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현 시점에서의 학회·학술 운동은 두 가지를 목적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학우들이 팩트와 임팩트를 각자의 기준에 따라 구분이 가능하게 하는 것과 둘은 학우들 스스로를 파악하게 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단 가능한 만큼, 눈을 가리고 있는 이데올로기들을 벗어 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제시한 방법론도 그러한 목적에 맞추어, 기존의 방법론보다 재단되어 있다. 또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러한 목적은 현 시점을 위한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 과정이 수반되지 않으면, 종전과 같이 ‘조직화를 통한 동원’이나 ‘본격적 의미에 있어서의 학습’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4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시점에서, 사람들만 변했다. 유/무산계급 문제, 식민/피식민지 문제, 남/여성문제 등등은 그대로 있지만, 소련이 무너지고,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며, 모두 핸드폰을 가지며, 모두 인터넷을 쓰니 사람들은 책에서만 보던 장밋빛 미래가 도래한 줄 알고 좋아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제는 근대 국가조차도 세련된, 비가시적인 방법으로 국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면 사람들은 경계심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이럴 때, 사람들에게 다시 긴장감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이 진보 진영의 역할이다. 그리고 학생 진보 진영은, 그 남다른 열망으로 큰 힘을 보탤 수 있다. 하지만 내부 논의가 더 필요한 시점이라는 판단이 들면, 그 열망을 얼른 그 방향으로 전화(轉化)시켜야 할 것이다. 학회·학술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주체와 목적을 한시적으로 바꾸어 가능한 빨리 제대로 정비하고 난 다음 활동에 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 않을 것은, 학회·학술 운동은 그러한 활동을 통하여 촉발된 폭넓고 구체적인 사유로 세계를 변혁하는 데에 그 진정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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